넣기소년의 신변잡기/탕비실 (잡담)

레고 블록으로 행성을 만든다면

Leejunn 2024. 12. 24. 14:48

 

약 1만 년 전부터 시작되어 현생 인류가 살고 있는 시대인 홀로세(=충적세)는 지질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 온도의 상승/하강 폭이 가장 적고 완만한 시기다.
지구의 온도에 단 몇 도의 변화가 가해져도 해류가 바뀌고 대기 조성이 달라지며 대륙 차원에서 기후가 바뀐다.
당장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에게는 기후 변화가 비극일지는 몰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에서만 비극에 불과하다.
생물 생태계 입장에서는 그렇게 썩 나쁘지만은 않다.
극적인 변화는 모든 생물종의 진화 속도를 가속화시키므로 변화 과정 중에 수많은 동식물과 균류가 죽어나가더라도 짧은 과도기를 거치는 것일 뿐이다.
종국적으로는 변화에 잘 적응한 진화를 적절하게 마친 생물에게는 새로운 번성과 기회의 시대다.
인류가 당장 없어지더라도 생물 생태계는 변화를 맞이할 때마다 너무나도 잘 적응해서 아주 오래도록 대를 이어갈 것이라는 점에 명망 있는 석학이든 이 기후에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이든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대의 주인공이었던 인류가 --이것도 물론 인간 중심의 사고 방식에서만-- 물러나고 이런 물갈이를 통해 새로운 주인공이 나타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이 아닐까?

초고대 문명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히 흥미로운 주제다.
그러나 나는 수만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학이 충분히 발달했던 초고대 문명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만 년 전부터 온도 변화가 가장 완만해졌기에 인류는 비로소 정착하여 농작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후 변화로 인해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던 고통스러운 이전 시대와는 달리 드디어 수천 세대를 넘어 지식을 보전시킬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안녕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초고대 문명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한 가지 더 들자면 이렇다.
홀로세 이전 시대인 플라이스토세(=홍적세)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던 문명이 있었다면 당대 사람들은 간빙기나 빙하기에 닥치는 기후 변화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이나 지식을 어떤 형태로든 --예를 들어 온칼로 핵폐기물 저장소의 경고 표시처럼-- 후대에 전수해 주었겠지만 기후 변화에 대한 경고와 관련된 그 어떤 흔적도 발견된 적이 없다.

(초고대 문명설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해저 바닥이 옛날에 육지였고 초고대 문명의 터전이었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런데 아래와 같은 사실은 분명히 주지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빙하 면적은 500만 제곱킬로미터 미만으로 추정되는데, 전체 기간 중 상당 비율로 빙하기였던 플라이스토세 때는 현재보다 훨씬 커 4,500만 제곱킬로미터 내외였기에 해수면 높이가 지금보다 평균 130미터 낮았다.
또한 사회 공동체가 물가에 자리 잡고 형성됐던 특성 --고대로 거슬러 갈수록 더욱 더-- 을 고려하면 해수면이 훨씬 높아진 지금에 이르러 당대 인류가 머물렀던 육지는 당연히 수장됐으므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간주한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수많은 민족이 지금까지 기록해온 역사서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전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홀로세 전의 기후 변화는 인류에게 가혹했고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것이 거의(완전히) 불가능할 정도로, 그리고 --문명이 태동했던 적이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껏 문명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모두 소실될 정도로 자주 닥쳐왔다.
그리고 현대의 사람들은 기후 변화를 이미 겪고 있으며 그 결과는 조상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할지도 모른다.

지금 인류가 해야 할 최선의 일이 무엇일까?
내 생각에 신은 인간이 지닌 여러 능력의 수치를 정할 때 개척에 대한 욕구와 미지에 대한 호기심은 충분한 수준 이상으로 부여했다.
반면 비닐과 플라스틱 생산량이 매년 큰 폭으로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 위기 의식을 부여하는 데에는 덜 신경을 쓴 것 같다.
위기 의식이 덜 메워진 만큼 근시안이 차지하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차기 갤럭시 플립과 아이폰이 어떻게 출시될지 매년 기대하고, 시도 때도 없이 다음 여름 휴가에는 어디를 가서 어떻게 근사하게 놀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게다가 사실 나는 환경 문제에 큰 경각심이 없고 기후 변화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닥쳐올 미래가 정말 파국적이라면 후손들이 덜 힘겹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소모적인 일을 그만 두고 우리 선에서 기회를 모색하는 행동을 당장 시작하기에 너무 멀리 와 있는지도 모른다.
화성으로 이주해서 입자 방사선을 차폐하여 테라포밍하는 계획이나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다른 행성을 찾기 위해 우주 항해에 나서는 계획의 실현 단계를 전개하기에도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는 본 글의 제목인 "레고 블록으로 행성을 만든다면"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한 도입부이자 밑밥이다.
그리고 레고 블록으로 행성을 만드는 상상을 왜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인류가 우주개척 시대를 열기 전 많은 난관들을 결국 극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레고 블록으로 대체 지구를 만들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레고 블록으로 행성을 만드는 것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인류가 그런 행성을 만든다면 아마 우주에서 공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마 한 번에 수 톤에서 수십 톤 씩 수백 수천 번을 우주로 날라야 할 것이고 블록을 제조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석유를 소모해야 할 것이다.
일단 레고 블록으로 만든 행성의 크기가 지구와 같다고 가정하자.
레고 블록으로 만든 행성의 밀도는 굳이 계산을 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보다 분명히 밀도는 낮겠지만 그래도 한 번 계산해 보자.

 

 

 

지구의 크기와 같은 레고 행성을 만든다고 가정하면 표준 블록(2*4, 길이 3.2cm, 너비: 1.6cm, 높이 0.96cm)이 몇 개나 필요한지를 계산하기 위해 우선 지구의 부피를 알아야 할 것이다.
지구의 평균 반지름은 약 6,371km인데 구의 부피 공식인 𝑉 = 4/3𝜋𝑟³를 적용하면 공식은 𝑉 = 4/3πr³ ≈ 4/3π(6,371,000m)³ ≈ 1.083 × 10²¹m³가 된다.
너비 1.6cm x 길이 3.2cm x 높이 0.96cm인 레고 표준 블록의 부피는 4.9152cm³다.
이를 m³로 변환하면 약 4.9152 x 10⁻⁶-m³다.
따라서 필요한 블록의 개수는 1.083 × 10²¹/4.9152 × 10⁻⁶, 즉 2.203 x 10²⁶개로 계산된다.
이 수를 풀어 쓰면 220,300,000,000,000,000,000,000,000, 220자 3천해 개가 필요한 것이다.
참고로 해는 1천 경의 위 단위다.

레고 블록 한 개의 평균 무게는 약 2.5g이다.
따라서 전체 블록의 무게는 2.203 × 10²⁶ × 0.002.5g = 5.575 × 10²³kg, 즉 약 5.5075 × 10²³kg으로 계산된다.
이 수를 풀어 쓰면 550,750,000,000,000,000,000, 5해 5075경 톤이 필요한 것이다.
이 무게를 지구의 질량인 5.597 × 10²⁴과 비교해보면 레고 행성의 무게는 지구의 약 9.22% 정도다.

레고는 스타이렌을 주원료로 아크릴로나이트릴과 뷰타다이엔을 중합한 ABS라는 플라스틱재로 만들어진다.
이 ABS 플라스틱을 1kg 생산하는 데 약 2kg의 원유가 필요하다.
이를 통해 레고 블록의 총 무게를 바탕으로 필요한 석유의 양을 계산해 보자.
정확히 2배로 가정하면 5해 5075경 × 2, 즉 11해 150경 톤의 석유가 필요하다.
색을 내는 데 필요한 염료 등은 모두 제외하고 레고만을 만드는 데 지구 질량의 18.44%에 해당하는 석유 자원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구의 추정 석유 매장량은 1초 배럴이다.
1배럴의 석유 무게는 139kg이므로 , 즉 1,390억 톤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이 추정 매장량을 모두 추출하더라도 레고 블록을 만들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석유의 0.00000125%에 불과하다.

레고 블록으로 지구 크기의 행성을 만들고나면 레고 행성의 밀도는 지구보다 낮을 것이다.
레고 행성의 질량인 5.5075 × 10²³kg을 지구의 질량인 5.597 × 10²⁴kg으로 나눈 것에 100을 곱하여 질량 비율을 계산해 보자.
질량 비율 ≈ (5.5075/5.972) × 10⁻¹ × 100 ≈ 0.0922 × 100 ≈ 9.22%
따라서 레고 행성의 질량은 블록 생산에 투입된 석유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구 질량의 약 9.22%다.

여기까지 레고 행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블록의 개수, 필요한 석유의 양, 질량을 구해보았다.
그런데 1부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행성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석유를 확보하든 블록을 모두 다 만들든 말이다.
이번에는 이 레고 행성이 어떻게든 완성됐다고 치고 어쨌든 중력을 계산해 보자.
관성 질량과 중력 질량의 비례는 등가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사실 중력 계산식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
중력 상수인 G는 6.67430 × 10⁻¹¹m³kg⁻¹ₛ⁻²이다.
표면 중력 g는 g = G × M / R²이라는 공식으로 계산된다.
계산식은 (6.67430 × 10⁻¹¹) × (5.5075 × 10²³) / (6,371,000)²과 같다.
따라서 레고 행성의 표면 중력은 약 g ≈ (6.67430 × 10⁻¹¹) × (5.5075 × 10²³) / 4.05876 ×  10¹³ ≈ 3.67624 × 10¹³ / 4.05876 × 10¹³ ≈ 0.905m/s²으로 계산된다.
지구의 표면 중력이 9.81m/s²이므로 레고 행성의 표면 중력은 약 9.22%에 해당한다.
 
​이 레고 행성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언급한 이유는 레고 블록으로 행성을 어느 정도 만들다 보면 완성에 한참 미치지 못한 시점부터 자체 중력으로 인해 붕괴되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는 각자 중력이 있고 물체들이 많이 모이다 보면 중력이 융합되어 중심부부터 붕괴되기 시작한다.
레고 행성이 붕괴되기 시작하는 시점은 블록의 압축 강도를 초과할 때부터다.
ABS 플라스틱의 압축 강도는 약 70MPa(메가파스칼)인데 이는 대략 m²당 7천 톤의 압력을 견딜 수 있다는 의미다.

레고 행성을 조립하는 과정에서 언제쯤 붕괴될지를 계산해 보자.
우선 블록의 단면적을 구해야 한다.
단면적은 너비 1.6cm × 길이 3.2 cm = 5.12cm²이며 이를 m²로 변환하면 5.12×10⁻⁴가 된다.
ABS 플라스틱의 압축 강도는 약 70MPa로 이는 70 × 10⁶N/m²이다.
따라서 블록이 견딜 수 있는 최대 압력은 F = σ× A = 70 × 10⁶N/m² × 5.12 × 10⁻⁴m², 즉 35,840N이다.
블록 하나의 무게는 2.5g이고 중력가속도는 6.67430m/s²이다.
블록 하나에 작용하는 힘 F는 질량 m과 중력 가속도 g의 곱이다.
따라서 F = m × g로 계산을 수행하면 F = 0.0025kg × 0.905m/s²가 되므로 F는 0.0022625N이 된다.

블록이 견딜 수 있는 최대 힘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블록의 개수는 최대 압력인 35,840N을 블록 하나에 작용하는 힘인 0.0022625N으로 나누어 구할 수 있다.
즉 15,843,354개의 블록을 조립하면 스스로의 중력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져 붕괴가 시작되며 더 이상 조립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개수는 레고 행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전체 레고 블록의 개수의 0.00000000000000071917%에 불과하다.

 

 

 

 


번외로 스타워즈의 데스스타를 다루어보자.
레고 행성보다는 데스스타가 훨씬 더 현실적이며 가능성도 매우 높다.
물론 스타워즈의 제국 시대와 같이 여러 행성으로부터 충당하지 않는 이상 필요한 건설 자원을 지구에 매장된 자원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데스스타의 직경은 약 160km로 설정되어 있는데 질량은 알려지지 않았다.
데스스타의 부피는 다음과 같다.
𝑉 = 4/3πr³이고 여기서 반지름 r은 80km(80,000m)다.
𝑉 = 4/3π(80,000)³ ≈ 4/3π × 5.12 × 10¹² ≈ 2.14 × 10¹³m³이 된다.
 
주로 금속과 복합소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부가 완전히 채워져 있지는 않다고 가정하고 평균 밀도를 3,500kg/m³라고 하자.
질량 m은 밀도 ρ와 부피 𝑉의 곱이다.
m ≈ 3,500kg/m³ × 2.14 × 10¹³m³이므로 데스스타의 질량은 7.49 × 10¹⁶kg, 즉 약 7경 4900조kg이다.
 
금속과 복합소재의 비율을 약 70 대 30으로 가정하자.
총 질량 중 금속의 양은 0.70 × 7.49 × 10¹⁶kg이며 복합소재의 양은 0.30 × 7.49 × 10¹⁶kg이다.
즉 금속은 5.243 × 10¹⁶kg, 복합소재는 2.247 × 10¹⁶kg이다.

지구의 금속 매장량은 분석 기관별로 차이가 크다.
다만 평균으로 잡았을 때 철 매장량은 약 1,800억 톤이며 연간 19억 톤이 생산되고 있다.
알루미늄 매장량은 230억 톤이며 연간 6,400만 톤이 생산되며 구리 매장량은 8.9억 톤이며 연간 2,000만 톤이 생산된다.
복합소재는 주로 섬유 강화 플라스틱(FRP)과 같은 고분자 복합소재다.
주요 성분은 플라스틱, 유리섬유, 탄소섬유 등이다.
금속보다는 생산량이 적으나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데스스타에 필요한 금속은 5.243 × 10¹³톤, 복합소재는 2.247 × 10¹³톤이다.
데스스타에 필요한 금속 중 철만 하더라도 지구에서 채굴 가능한 철의 양을 아득히 넘어선다.
복합소재의 생산량이 어떻게 될지는 미래 동향을 알 수 없으나 금속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생산량을 훨씬 웃돌 것이다.
데스스타에 필요한 금속을 계산해 보면 철은 지구 매장량의 약 291.28배, (복합소재의 일부로 가정한) 알루미늄은 97.7배가 필요하다.
철과 알루미늄의 현재 연간 생산량을 기준으로 채굴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각각 27,594년과 351,093년이다.

지금 수준의 과학 기술로는 공상 과학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