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 모든 인간 행동 유형을 몇 가지 범주화 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 위험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사업가들의 유형과 특성을 4가지로 나눠보면 의미 있는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분야든 범주화를 시도하면 외부 정보를 흡입할 때 빠르고 체계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틀이 됨과 동시에 편견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한계도 유념해야 한다.
2. 최근 지인의 지인 집들이를 하며 사업하는 사람들의 유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날 파티의 호스트는 명문 사립대를 졸업하고 회사를 창업해 매각에 성공한 이른바 ‘스타트업 엑싯 세대’ 중 한 명이었다. 사람마다 기준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경제적 자유를 이룬 이 젊은 창업가와 사업해서 이른바 성공 궤도에 오른 사람들의 유형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목에도 써놓은 정파, 사파, 야생, 야수의 네 범주를 엄밀하게 정의하기란 쉽지 않지만 정파는 우리가 성공한 사업가들에게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는 지성, 도덕, 법치주의, (매스미디어를 통해 덧씌워진 이미지) 경영 능력 등을 갖춘 사업가들의 부류를 의미한다.
처음 이 단어를 말한 사람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VC 업계 엘리트 코스를 밟은 매우 유명한 분이었다고 한다. 이 분이 타사 이야기를 하다 ‘대표가 어디 학교 출신이에요?” “거기는 선 많이 넘는 야인 아니에요’ 라는 말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차원적으로는 대표의 ‘학벌’과 ‘선을 얼마나 넘느냐’ 하는 것이 판단 기준이었다.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 대표들이 ‘선’을 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VC 업계 사람들을 만나보면 xx 회사에 투자했는데 대표가 미쳐서 갑자기 레인지로버를 사고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사용했다 등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스타트업 씬에 돈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xx 밸류에 xx원 투자 받았다 하는 스타트업 대표들이 많았었다. (예컨대 대표는 500억 밸류에 30억을 투자받으면 자신이 마치 500억 원대 부자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기업가들이 정파에 해당한다. 여기서 착각하면 안되는 것이 ‘정파’에 속한다고 해도 꼭 법을 잘 지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파 계열에서 크게 성공한 (끝으로 가면 대기업) 기업가들은 유능한 법률가와 회계사들을 고용해 법망을 합법적으로 우회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꼭 법을 통해서 우회해야 정파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냥 법을 쌩까면 그건 야생이나 야수다.)
또한 젊은 사업가들 중에서는 스타트업 같은 부류의 회사를 창업해 PE 등에 비싼 가격에 매각한 대표들도 정파에 해당한다. 사업이란 물불 안가리고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을 내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정말 물불 안가리게 되면’ PE에서 그런 회사를 매입해주지 않는다. PE에서 매입한다는 뜻은 명확하게 제도권에 편입됨을 의미한다. PE에서 아무리 영업이익이 높은 가라오케나 룸싸롱을 매입하지 않는다. 이런 쪽은 사파나 야생으로 분류된다. 그럼 정파와 사파, 야생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일까.
3. 기준 (이날 집들이 호스트 스타트업 엑싯한 A 대표가 말한 기준)
그가 생각하는 기준은 ‘리스크 관리’ 여부 였다. 리스크 관리는 업무의 본질적인 부분과 비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리스크 관리.
A대표가 속한 소비재 업계를 예로 들면 광고 규정 준수-수위를 기준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특허권에 대한 이해나 관리도 포함된다고 한다. A가 해 준 이야기 중 아주 크게 공감되는 게 있었다. 마케팅을 할 때 대표 개인의 브랜딩이 과장되어 있거나 상품에 대한 정보가 법의 테두리를 넘어 과장되어 있는 경우 불법은 아니지만 여론의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SNS나 유튜브로 성장한 업체들은 초반 사람들의 시선(어그로)을 끌기 위해 대표 개인의 이력이나 자격 또는 성장 스토리를 매우 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회사에 큰 리스크 요인이 될 수 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어그로를 끌어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 대표도 ‘작은 성공에 취하는 경우’ 큰 리스크 요인이 될 수 있다.
또한 A 대표에 따르면 비본질적인 업무의 영역으로 회계-세무관리, 근로기준법 준수 여부, CS운영 매뉴얼 정도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회계관리가 중요한 이유를 1) 안정적인 현금흐름관리 2) 세무조사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회사의 존폐를 좌지우지 할 정도 라고 설명하는데 이 이야기만 들어도 그가 얼마나 제대로 사업체를 꾸려 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뻔한 말 같지만 ‘사파-야인’에 걸쳐져 있는 대표들은 회계-세무에 대해 보통 무지하고 그것이 가져올 파급력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매출 규모가 상당한-급성장한 쇼핑몰들 중 CS매뉴얼의 부재, 주먹구구식 운영, 탈세 법인 등을 활용하다 여론화 되면서 1년도 안돼 회사가 거의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른 경우를 수없이 많이 본다.
4. 대표와 회사가 회계 기준에 따라 회계처리를 하고 세무신고를 하느냐로 구분되는 기준
100% 이 기준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모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 법인카드로 여자친구의 명품을 사주는 등의 황당한 일도 발생하지 않는가) 경험적으로 보면 대체로 맞다. 어떤 분야든 정파, 사파, 야생으로부터 올라와 성공하는 사업가들이 있다. 모두 뒤섞여 있다. 따라서 사업 분야별로 구분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경향성은 있다. 경험상 영업조직만으로 성장한 회사는 대체로 회계처리가 엉망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대표가 회계-세무를 제대로 신고하며 사업을 해 본 적이 없고 주변을 봐도 그런 사업자가 많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중고차 상사 중 부가세 신고조차 적법하게 하는 곳이 많지 않다. 고가 차량을 수입할 때 과세표준을 현저하게 낮게 신고해 관세, 부가세 등을 탈루하는 것도 비일비재한 이유는 이 업계가 원래 그렇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업계에는 야인들이 많다. )
경험적으로 보면 야생으로부터 올라와 성공한 것처럼 보여지는 사업가들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캐쉬플로우(Cash Flow)는 좋은데 자산은 많이 없으며 회사 구조상 회사 영업이익은 꽤 나는데 지나치게 이상한 곳에서 비용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 비용들 중 ‘제도권에서 보면’ 인정할 수 없는 대표이사의 주택 구입, 사적 자가 렌트비 처리, 심한 경우 갤러리아 백화점 명품관에서 수천만원씩 명품백이나 옷을 구입하는 등 슈퍼카 리스료를 처리하는 건 애교 수준인 경우가 많다. (회사명의로 계약한 하이엔드 오피스텔에 살면서 돈자랑을 하는 사람은 일단 거르는 게 맞다. 난 주변에서 정말 부자 중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만약 회사를 엑싯하려고 준비하는 대표라면 이런 부분부터 문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제도권에서 볼 때 대표가 회사에서 번 돈을 무계획적으로/무지성으로 빼먹는걸로 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며 이런 회사는 보통 많은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기 마련이다.
또한 야생으로부터 일정 이상의 캐쉬플로우를 만든 사업가들 중 회계/세무에 무지한 경우가 매우 많다. 대표가 회계/세무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지만 사업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다 알게 된다. 회계사/세무사 만큼은 아니어도 대략적으로 자기 산업 안에서 어떤 부분이 이슈가 되는지, 매출과 영업이익 구조가 어떤지, 판관비는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등을 모를 수 없다. 이런 부분들을 전혀 모르는 대표들이 생각보다 많다. 작은 소기업(매출 100억 이하), 중소기업(100억~500억), 중기업(500억~1000억), 중견기업(1000억 이상) 젊은 대표들을 만나다 보면 누가 정파, 사파인지 몇 시간만 이야기해봐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꽤 있다. (물론 매출이 1000억 넘어가는 대표들 중에서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매출 50억대 대표가 갖춰야 할 능력과 인사이트, 100억대, 200억대, 1000억대 갖춰야 할 덕목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매출이 1000억이 넘어가는데 이런 부분에 무지성이라면 많은 경우 돈이 여기저기 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고 그런 회사가 계속 잘 되는 건 쉽지 않다.)
5. A 대표는 ‘왜 우리는 정파가 되어야 하는가’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한다.
1) 사업의 연속성
2) 확장을 위한 필요조건
위에서 이야기한 리스크 관리는 사업의 연속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위에서 언급한 리스크들은 사업을 한 방에 날려먹을 수 있을 만큼 중대하다. 실제 그런 케이스들이 많다.
그리고 A대표는 규모 확장을 위해 내외부를 정파스럽게 만들 것을 권유한다. 처음 사업을 할 때는 법을 조금 어기고, 세금도 덜 내고 운영해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디만 규모가 커질수록 점차 당국과 여론의 제재를 받는다. 또한 가장 큰 문제는 대표가 야인일 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데 있다. 난 이를 대표의 마인드 셋(Mind set)이라 부르는데 한 번 야인의 마인드 셋을 가진 대표가 정파스러운 마인드 셋을 갖는 건 쉽지 않기도 하다. 야인의 마인드 셋이 강하게 장착한 대표는 작은 성공을 크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고 회사와 자신의 캐쉬플로우를 관리하지 않고 과시적 소비/보여지는 소비에 집중하는 경향이 크다. 아주 운이 좋게 사업이 계속 잘된다면 문제가 없지만 사업의 캐쉬플로우는 늘 곡선을 탄다.
A 대표는 ‘최소한의 룰’을 지키는 걸 동네축구와 가라 룰로 친 싱글 골퍼에 비유한다. 가라 룰로 싱글 골퍼가 되고 그것으로 내기 골프에서 아무리 많은 돈을 딴다 해도 프로골퍼가 될 수 없고 룰 없는 동네 축구에서 아무리 날린다 해도 손흥민 같은 연봉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6. 그러나 야인들의 회사 매출이 오히려 더 빠르게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주변을 보면 많다. ‘난 정직하게 했는데 (과장 광고나 허세, 탈법 등) 야인처럼 하는 사람이 더 많은 매출을 낸다’ 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멀리 안가고 유튜브만 봐도 자극적인 방식으로 하면 채널을 더 빨리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요즘은 약발이 조금 떨어졌지만 xxx억 원 부자가 되었습니다 라는 썸네일을 걸고 자신이 얼마나 성공한 사람인지 약 파는 컨텐츠들이 예전에도/지금도 잘 먹히는 건 사실이지 않나.
유튜브의 세계가 아니라도 모든 사업 영역에서 오히려 정직하게 /룰을 잘 지키는 사람보다 룰을 조금 어기고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야인들이 더 큰돈을 벌거나 같은 사업 영역에서 더 크게 성공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래서 정파들도 박탈감이 생길 때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다. 다만 내가 경험상 정파의 길을 꾸준히 걸어온 사람은 결코 야인이 될 수 없다. 양심 때문이라기 보다 결 자체가 안 맞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평생을 야인으로 살아온 사업가가 갑자기 정파가 되기도 역시 힘들다. 애초에 마인드 셋, 자신이 성공 방정식이라고 여겨 온 것들을 한 번에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난 주변에서 야인으로부터 성장해 최소한 사파까지 올라온 대표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이 모두 원하는 것은 ‘정파로 가는 것’이다. 평범한 대기업 직장인 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고 대표 직함을 달고 직원들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제도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은 원래 주변에 있었던 야인들과 다르다고 차별화 하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우 이때부터 회계-세무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며 회사와 자신의 리스크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 문제가 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한 번 야인으로 성장한 대표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야생의 마인드를 바꾸는 건 정말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파로 갈 수 있는 사람은 많이 없다. 이는 회사의 규모가 크게 상관없다.
그렇다면 야인으로부터 출발해 사파, 정파로 가고 싶은 대표들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 라고 묻는다면 ‘공부를 해야 한다.’. 여기서 공부란 우리가 중고등학교/대학교 때 배우는 경영, 회계, 재무관리, 각종 인문학적 교양(이런 걸 공부하면 좋긴 하다. 그러나 나이들어 평생 책 한 자 안 펴본 야인이 공부를 하는건 역시 매우 어렵다.) 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고 ‘정파스러운 사람들’과 최대한 가까이 어울리려 노력하며(준거집단 교체), 그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관과 룰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지식과 미래를 대하는 마인드 셋을 최대한 내재화 하려는 게 중요하다.
겉으로만 그럴 듯 하게 자신을 포장하려 하면 안된다. 야인의 마인드 셋을 숨기며 정파스러운 척을 하는 건 오래 가지 않아 간파당하고 만다. 자신이 야인인 시절 만났던 사람들과 사파-정파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지적 레벨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에 자신이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다. 여기서부터는 정면승부를 해야 한다. 게으름, 나태함, ‘있어빌리티’, 임기응변, 과장+포장된 이미지로만 승부하려 하지 말고 여기서부터는 진짜 실력을 쌓아야 한다. 이게 정파로 가는 길이라 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야수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감옥 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부류이기 때문에 무조건 인생에서 피해야 할 유형이라 생각한다. 이정도의 마인드 셋을 가진 사람들은 언젠가 피해를 주는 경우가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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